바로가기 메뉴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주민소통

마을명소 예산군 내의 아름답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발굴, 보전, 공유하기 위해 마을명소를 소개합니다.

No.232021-04-30Hits.860

삽교읍 송산리 마을명소

공동우물

예산군행복마을지원센터

  • 위치 삽교읍 송산리
    (충남 예산군 삽교읍 송산1길 31 )
  • 대상물·시설분류 물∙하천

지 역 : 예산군 삽교읍 송산리

소 재 : 공동우물, 동학농민군, 마을주민들

시 대 :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내 용 : 송산리 주민들이 애용하던 공동우물은 특히나 빨래하기가 좋아 동네 아낙들의 대화의 장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3만여 명의 농민군들이 진격하다가 송산리에 유숙을했고, 공동우물에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탄신제를 지내며 다음 날 있을 전투의 승리를 기원했다. 그들의 전투는 실패와 죽음으로 끝이 났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도 송산리 주민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숭고한 뜻을.


송산리 공동우물과 동학농민군


퐁퐁 깨끗하고 시원한 물이 솟는 샘물은 마을의 중요한 자원이었다.

샘이 솟는 통로는 좁지만 물이 흘러내리는 주변 터를 고르고 반듯하게 닦아

빨래를 하기에도 적당하고 설거지를 하기에도 좋았다.

그래서 공동우물에는 늘 사람이 있어서 만남의 장이 되기도 했다.


“팡! 팡! 펑! 펑!”

빨래방망이로 젖은 옷을 때리는 소리가 삽교읍 송산리 온 동네에 울려 퍼진다. 고된 시집살이에, 밖으로 도는 남편에, 말썽부리는 자식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를 빨래방망이 끝에 담아 시원스럽게 날려 보내려는 듯. 아낙네들은 왁자지껄 수다를 떨다가 깔깔깔 웃으며 빨래를 한다. 빨래라는 행위 자체도 힘든 하루 일과 중의 하나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는 있다.

퐁퐁 깨끗하고 시원한 물이 솟는 샘물은 마을의 중요한 자원이었다. 샘이 솟는 통로는 좁지만 물이 흘러내리는 주변 터를 고르고 반듯하게 닦아 빨래를 하기에도 적당하고 설거지를 하기에도 좋았다. 그래서 공동우물에는 늘 사람이 있어서 만남의 장이 되기도 했다.

며칠 후, 마을에는 뭔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소문은 들었건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무장한 군인들. 사실은 군인이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농민이라 했다. 이렇게 무기를 들고 나선 것은 탐관오리들의 불법착취와 이를 알고도 묵살하는 정부, 사람은 모두 평등한 존재임을 주장하는 동학교도들을 탄압한 때문이었다. 마을에도 은밀히 동학에 입도한 몇몇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학농민군의 기세는 대단해서 관군과 붙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라도 일대를 휩쓸었다.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동학농민봉기를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깨닫고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는데, 이에 일본도 일본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서울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게 조선을 둘러싼 청일 양국 사이에 전운이 감돌게 되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는 등 내정간섭이 심각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동학농민군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다. 나라의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은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다시 한 번 일어났다. 직접 일본을 몰아내려는 일념으로 한양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 통로에 바로 예산을 비롯한 내포지역이 있었고 그 중심에 송산리와 역리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신례원 관작리에서 내포지역과 충북 진천 등의 농민군까지 합세하여 충남 최대 집결지를 이루었다. 1894년 10월 26일 오전, 한양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홍주에서 관군과 유회군이 공격해오자 동학농민군은 포위 작전을 펼쳐 대승을 거두었다. 동학농민군의 지휘부는 한양 진격 계획을 접고 후방에서 공격하는 토벌군의 진원지인 홍주성을 우선 점령하자는 주장이 있어, 다음 날인 10월 27일 예산 관아를 점령한 후 삽교 역리와 송산리로 진군하고 유숙하였다. 10월 28일, 송산리의 동네 아낙들이 빨래하고 생활용수를 얻기 위해 뻔질나게 드나들던 그 공동우물에서 3만여 명에 이르는 동학농민군들이 창시자였던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탄신제를 올렸다. 그러고 난 후 홍주성으로 향해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높고 견고한 석성 위에서 공격하는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결국 전투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동학농민운동이 그렇게 끝이 나고 후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군의 추격이 계속되어 동학농민군은 현장에서 처형당했다. 그들이 머물고 간 마을은 고요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이 흘러갔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엔 울분이 쌓였다. 힘없고 천민이면 윗분들의 횡포를 그저 견뎌야 하는 건지, 정부도 해내지 못한 외세 척결을 농민들이 해결해보고자 들고 일어났더니 도리어 관군에 몰살당하는 이 현실……. 화를 당할까 겁나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지만 사람들의 가슴엔 응어리가 되어 맺혔다.

세월이 흘러 일본에 넘어갔던 나라는 독립투사들의 용기와 투지에 힘입어 광복을 맞았고, 한국전쟁까지 치른 후 황폐해진 곳곳을 복구하느라 빠르게 변화했다. 송산리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공동우물은 그대로 남았다.

여전히 솟는 샘물은 시원했고 보글보글 소리마저 명랑했다.

“팡! 팡! 펑! 펑!”

빨래방망이가 젖은 옷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두 아낙의 대화소리가 들린다.

“성님! 우린 언제 수도가 들어온대유? 옷이며 그릇이며 머리에 지고 우물터 다니는 이 짓도 지겨워 죽겄네유.”

“그러게 말여. 듣자 허니께 잘사는 부자양반들은 빨래 빨아주는 세탁기라는 물건도 있다던디. 죽기 전에 구경이나 해볼 수 있을랑가.”

“근디 성님. 이 우물터가 옛날에 농학농민군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이 제를 지내고 했던 데라면서유?”

“그렇지. 큰 전투를 앞두고 여기서 제를 지내면서 다 같이 마음을 가다듬고 했다는구먼.”

“에휴, 그럼 뭐한대유. 그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서 다 죽었다 그러던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항상 그렇게 당하기만 허고, 참 마음이 거시기하네유.”

“…….”

대답 없는 아낙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이 이만큼 변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숨죽이고 참기만 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막강한 세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어도 세상을바꾸고자 했던 그들의 용기와 투지를 기억하고 그 흔적을 보존해야 한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 지금의 우리와 예산이 있는 것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