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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소통

마을명소 예산군 내의 아름답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발굴, 보전, 공유하기 위해 마을명소를 소개합니다.

No.312021-04-30Hits.849

대흥면 갈신1리 마을명소

6가송

예산군행복마을지원센터

  • 위치 대흥면 갈신1리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갈신길 6 )
  • 대상물·시설분류 식물

지 역 : 예산군 대흥면 갈신1리

소 재 : 6가송, 쉼터, 산신제

시 기 :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내 용 : 누구나 편하게 와서 쉬었다 가는 곳, 6가송은 2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공원 같은 곳이었다. 그늘이 우거져 낮잠을 청하거나 매 절기마다 모여서 그네 타기, 풍물놀이를 하는 등 다양한 오락거리가 6가송에서 펼쳐졌더랬다. 세월이 흘러 마을에 노인들이 많아지고 관리의 어려움으로 6가송은 이름처럼 여섯 그루의 소나무만이 남았다.


200년 넘은 갈신리 마을공원, 6가송


200여 년 전에는 여섯 그루가 아니라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 숲속 같았다.

그늘이 드리우고 솔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시원했던지.

바쁜 농사일을 끝내면 잠깐씩 쉬기 위해 모여들곤 했다 .

갈신리 사람들이 아무 때고 와서 쉬었다 가는, 지금으로 말하면 공원 같은 곳이 바로 여기였다.

그 많던 소나무가 이제는 단 여섯 그루만 살아남아 ‘6가송’이란 아련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매끈한 나무줄기를 뻗고 서 있는 6가송은 제법 운치가 있어 사진 찍기 좋아하는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언덕배기에 우뚝 솟은 6가송을 저 멀리서 사진에 담아내면 파란 하늘을 배경삼아 구불구불 풍류를 아는 푸른 소나무가 박혀있어 시원스러운 맛이 있다.

200여 년 전에는 여섯 그루가 아니라 소나무가 우거져 있어 숲속 같았다. 그늘이 드리우고 솔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시원했던지. 바쁜 농사일을 끝내면 잠깐씩 쉬기 위해 모여들곤 했다. 그러다 보면 막걸리도 한 잔 하게 되고, 하하 호호 농담을 나누며 삶의 활력을 찾은 뒤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다. 땅바닥에는 온갖 잡초가 폭신하게 깔려 드러누우면 금세 낮잠 한숨 붙이게 되는 마음 편한 곳. 갈신리 사람들이 아무 때고 와서 쉬었다 가는, 지금으로 말하면 공원 같은 곳이 바로 여기였다. 그 많던 소나무가 이제는 단 여섯 그루만 살아남아 ‘6가송’이란 아련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가볍게 쉬기도 하고 거하게 쉴 때도 있었다. 단오 날이면 소나무에 그네를 매달아 뛰었다. 아낙네들이 그네를 뛰면 꼭 춘향이처럼 꽃다홍 치마를 입지 않아도 어여뻐 보이기 마련이다. 얼빠진 미소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잠시, 남정네들은 흥겹게 풍물놀이를 한다. 집집마다 농사를 도와주는 두레를 하고 나서 힘겨움을 풍물로 녹여내는 것이다. 깨개갱 꽹과리며, 뚜그덩 뚜그덩 장구와 북소리며, 부앙 하고 묵직한 징소리가 저 하늘 높이까지 울려 퍼지면 그에 질세라 그네도 점점 더 높이 올라가곤 했다. 동네 아이들은 경사진 비탈에서 미끄럼을 타고 놀았다. 왁자지껄 웃으며, 막걸리도 한 사발 걸치며, 아낙네들이 준비해온 쪽파전도 입속에 집어넣으며 농사로 인한 시름을 까맣게 잊어본다. 이도 저도 끼지 않은 사람들은 그저 시원한 나무 그늘에 가만히 앉아 그런 모습들을 지켜만 보아도 흐뭇하고 정겹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고, 천국이 따로 있으랴. 이때만큼은 사는 것이 즐겁고 맛이 난다.

6가송은 마을 공동의 땅은 아니었다. 어느 날, 새로운 땅주인은 6가송 자리를 사면서 소나무를 팔려고 내놓았다. 마을어르신들은 땅주인을 찾아가 부탁했다. 6가송은 동네사람들이 직접 심어 가꾼 것이고 그곳에서 오랜 시간 많은 추억과 역사가 있어왔으니 소나무만은 그냥 남겨달라고. 땅주인은 그러겠노라 약속했고 6가송은 그렇게 살아남아 마을 곁에 서 있다. 마을에서는 그 6가송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주변 땅이 칡으로 덮여있어 관리가 쉽지 않았고, 군에 보호수 지정을 신청했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200여 년이 넘은 마을공원 6가송은 처량한 신세가 되었지만, 4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제사들은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그 옛날 산이 우거져 호랑이 등의 산짐승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하여 이를 피하게 해달라고 빌기 시작한 것이 산신제의 시초다. 부정하지 않은 깨끗한 사람을 제주로 골라 제를 지냈는데 지금은 산신제마저도 계승하려는 사람을 찾기 어려워 이장이 제주가 되고, 마을지도자가 주선을 하고, 부녀회에서 상과 음식을 차리고 있다. 제사는 구역별로 상당, 중당, 하당에서 지내는데, 현재는 정월보름날 동네안녕기원제로 완전히 자리 잡았다. 마을제사에 대한 관심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우려해 예전 같았으면 마을 사람들의 이름만 부르고 축원 내용은 이하동문으로 읽고 말았던 것을, 이제는 한 가정, 한 사람 정성을 담아 축원을 해주니 점차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농사기술이나 장비가 발달하지 않아서 두레와 같은 공동 작업이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동네마다 단합이 잘되어 일이든 놀이든 ‘같이’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는데……. TV, 휴대폰 등 보고 들을 것 많은 요즘 사람들이 6가송을 이해할 날은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돌아오는 매 절기를 구실 삼아 6가송에 한데 어울려 놀던 그때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