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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소통

마을명소 예산군 내의 아름답고 소중한 문화유산을 발굴, 보전, 공유하기 위해 마을명소를 소개합니다.

No.352021-04-30Hits.785

고덕면 호음2리 마을명소

전통짚풀공예

예산군행복마을지원센터

  • 위치 고덕면 호음2리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재호지길 8 )
  • 대상물·시설분류 시설

지 역 : 예산군 고덕면 호음2리

소 재 : 짚풀공예, 전봉남 어르신

시 대 : 현대

내 용 : 전봉남 어르신은 짚풀로 생활용품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탑이며 집 같은 예술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어르신이 노인회장이던 10여 년 전, 호음2리는 전통짚풀공예로 유명세를 탔고, 체험활동이며 방송이며 찾는 이가 많았다. 전국 각지에서 밀려오는 주문에 어르신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관심은 사라졌고, 짚풀공예기술의 맥이 끊길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전봉남 어르신의 파란만장 짚풀공예


돗자리를 만드는 기술은 굉장히 복잡하고 정교하며

왕골을 단단히 묶는 끈마저 직접 제작해서 사용했었다.

칡넝쿨을 끊어다가 삶아서 심이 있는 속은 버리고

북실북실 털이 가득한 겉을 훑어낸 후 꼬아야 비로소 칡끈이 완성된다.

그런 고되고 힘든 과정을 되풀이하려 드는 사람은 이제 찾기 힘들다.


두 번의 전성기가 있었던 것 같다. 전봉남 어르신은 짚풀로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손기술이 아주 뛰어났다. 흔히들 만드는 짚신, 소쿠리 등을 만드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탑 모양도 만들고, 집 모양도 만들고 어쩌면 마음먹은 건 다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관심도 많았고 소질도 있었다. 평소 시간이 날 때 심심풀이 삼아 만들곤 했던 것인데 2001년 군에서 주최한 노인솜씨자랑대회 공예 부문에서 최우수상도 탔다. 이런 것으로 상을 타게 될 줄이야. 어리둥절 놀라기도 했지만 기분도 몹시 좋았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호음2리 마을회관에서 농한기가 되자 모두가 전봉남 어르신이 되었다. 삼삼오오 마을어르신들이 모여 짚풀을 가지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새끼를 꼬아 도롱이, 소쿠리, 짚신, 망태기 등 다양한 물건을 만들면, 방 한구석에서는 아주머니 서너 명이 틀에 새끼줄을 엇갈리게 꼬아 멍석을 만들었다. 바로 고덕면 호음2리의 노인회가 짚풀전통공예를 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모여서 정겹게 이야기도 나누니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호음2리는 2006년에 ‘농촌건강장수마을’, 2008년에 ‘참 살기 좋은 마을’로 지정됨과 동시에 ‘전통짚풀공예마을’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봉남 어르신이 개인적으로 하던 것이 마을주민이 모이면서 규모가 커졌다. 그러다 TV프로그램의 단골 촬영장소가 되기에 이르렀고 학생들도 이곳에 찾아와 짚풀공예를 직접 체험하면서 조상들의 농경문화를 배우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마을이 됐다.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그때는 농사일이 없어 쉬어야 하는 농한기임에도 전국 각지에서 오는 주문을 소화하느라 더 바빠졌다고 푸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판매수익은 마을 발전을 위한 자금으로 요긴하게 쓰여서 좋았다. 당시 호음2리 노인회장이었던 전봉남 어르신은 인생의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은듯했다.

꼭 짚풀공예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노인회는 대부분 환갑을 넘긴 노년의 나이지만 ‘즐겁고 보람 있는 노후’를 위해 밴드를 결성했다. 이름하여 ‘호음 황매실 실버밴드’. 이 밴드는 기타, 전자오르간, 드럼, 색소폰 등 그들만의 화음을 자랑했다. 당시 군 농업기술센터에서 음악강사 초빙 비용을 지원해 줬고, 주민들은 손수 악기를 구입했다. 2007년에는 전국농촌장수마을 평가회에 충남 대표로 나가 특별상을 받는 등 그 실력도 인정받았다.

2010년 말, 마을 논두렁에 조성해 화제가 됐던 썰매장은 겨울방학을 맞은 어린이들이 썰매타기, 팽이치기 등 전통놀이를 하며 추억을 쌓을 수 있게 했다. 그때는 정말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하루하루가 재밌었다.

또 10년이 흘렀다. 노인회를 구성하던 어르신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났고, 전봉남 어르신도 팔순을 넘겼다. 실버밴드 당시 입었던 자주색 유니폼은 옷걸이에 걸린 채로 노인회관에 남겨졌고, 전국 각지의 관심을 받았던 짚풀공예품들은 선반에 놓인 채 먼지가 쌓여갔다. 아주 간혹 짚풀공예에 관심을 보이며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지만 단발적일 뿐 금방 시들해졌다. 더 이상의 주문도 없었다. 주문이 없으니 만드는 이도 없었고, 만드는 이가 없으니 공예기술은 전수되지 않았다. 이제 전봉남 어르신마저 없으면 맥이 끊길 것이다.

어르신은 가끔 노인회관에 나와 한참을 말없이 공예품들을 바라보곤 한다. 언제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 누군가 물어온다면 하나도 기억을 더듬지 않고 술술 설명할 수 있다. 그럴 때면 다시 눈에 총기가 돌고 설명에 힘이 붙는다. 그만큼 애정을 갖고 있는 짚풀공예다.

전봉남 어르신은 특히나 돗자리를 만들던 틀에 갖는 애정이 남다르다. 돗자리를 만드는 기술은 굉장히 복잡하고 정교하며 왕골을 단단히 묶는 끈마저 직접 제작해서 사용했었다. 칡넝쿨을 끊어다가 삶아서 심이 있는 속은 버리고 북실북실 털이 가득한 겉을 훑어낸 후 꼬아야 비로소 칡끈이 완성된다. 그런 고되고 힘든 과정을 되풀이하려 드는 사람은 이제 찾기 힘들다. 더구나 튼튼하고 보기 좋은 플라스틱 용기며 유리그릇이 가득하고, 푹신하고 고운 카펫이나 장판이 있는데 굳이 뭣하러 까실한 짚풀용품을 찾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전봉남 어르신은 아쉽다. 필요 없다 하여 사라져야 하는가. 태어나자마자 하루아침에 세상 이치를 아는 어른이 되는 경우는 없다. 지금 이렇게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짚풀로 대부분의 생필품을 만들어 쓰던 그때 그 시절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일 텐데. 조상들의 지혜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제조원리가 얼마나 과학적인지, 또 그렇게 완성된 짚풀용품의 자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후손들은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또 지켜나가야 할 의무까지.

이제는 ‘공예’가 되어버린 고덕면 호음2리의 짚풀용품은 여전히 노인회관 선반 위에서 쌓인 먼지에 아파하며 세상이 다시 한 번 돌아봐주기를 기다리고 있다.